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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메시지 에세이

그러다 갑자기 입을 맞췄다.

by 라이팅 매니저 2024.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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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가고 가을이 이제 막 와서  쌀쌀해질 때쯤에 그저 그런 사람을 만났다. 키는 178에 머리는 대충 부스스하지만 덩치 있는 몸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저 전에 내가 만난 사람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보자마자 긴장해서 손도 떨고 땀도 나는 모습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서로 농담들을 주고받고 서로 고민도 얘기하고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더 알아가는 게 너무 좋았다. 항상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던 나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그 친구가 웃고 눈을 깜박이고, 숨을 쉬는 모든 게 특별해지고 소중해졌다. 쓰나미처럼 나에게 스며드는 것을 알았을 때쯤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정말 힘들겠구나.’     

 

 하루하루가 특별했고, 소중했다. 왜인지 모르게 살면서 내가 이런 사랑을 받아도 되는 걸까 싶었다. 같이 걷는 모든 거리가 파리의 거리보다 낭만 있었고, 같이 본 석촌호수는 어떤 호수보다 빛났다. 같이 아무 말 없이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ᅠ갈리고 걔의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그저 끝말잇기를 하면서 어린아이처럼 유치하게 장난치고 크게 웃고 어떤 놀이보다 재미있었다. 그 아이와 함께 지하철역으로 뛰어갈 때면 이렇게 계속 뛰어가면서 숨이 차 죽기 전까지 뛰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날은 그 아이가 내 인생에 뛰어들기 이틀 전이였다. 그날은 아침에 보슬비가 내려 유난히 축축하고 눅눅한 날이었다. 그날은 석촌 호수 때문인지 비 때문인지 그 아이가 추워 보인다고 벗어준 후드티에서 나는 향인지 모르지만 촉촉하고 파란 청록색의 향기가 났다. 걷다 보니 그 아이의 집 주변에 있던 놀이터가 보였다. 그곳은 뭔가 사연 있어 보이는 적막한 분위기의 배 모양 놀이터였다. 크기는 크고 그 공간을 꽉 채웠지만 무언가가 공허했다.     

 

 나에게 놀이터는 그저 어린 나이에 놀러 가면 친구들이 있고, 웃음과 재미로 가득 찬 공간이다. 하지만 그 아이에겐 놀이터는 힘든 현실에서 잠깐 도망치게 해주는 탈출구였다. “난 힘들 때마다 여기 와서 멍 때리면서 노래 들으면서 있는데, 그때는 여기가 엄청 우울했는데 지금은 왜 놀이터가 이뻐 보일까.”라고 했다. 그 아이에게 동정하는 눈빛을 보이기 싫어서 바로 폰을 들고 노래를 틀었다.     

 

백현의 <LOVE GAIN>을 틀었다. 뭔가 축축하고 청록색의 향기와 나뭇잎에 살짝 떨어질 락 말락 한 이슬과 우리의 얼굴을 반만 비추는 어스름한 빛의 가로수와 고요 속에서 노래가 퍼졌다. 나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듯, 아닌 듯 입술로만 따라 불렀다. 그러다 갑자기 입을 맞췄다. 왜인지 모르게 나는 향수 냄새와 감기약 먹은 듯한 몽롱함. 그 순간 바로 노래의 하이라이트가 나왔고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 같았고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랐다. 그렇게 인생에서 지워지지 못한 한 순간이 지나갔다     

 

 하지만 사랑이 문득 찾아오듯 이별도 갑자기 찾아온다. 정말 공허하고 갈피를 잃은 듯했다. 마치 욕조에 떠다니는 종이배 마냥 마음이 붕붕 떠다녔다. 그리고 이번 살랑에서 배운 점이 있다. ‘사람을 너무 믿지 말자, 너무 마음을 주면 내가 너무 고생한다.’ 하지만 이번 사랑에서 가장 크게 얻은 것은 이런 아픔을 무시할 정도로 사랑은 달콤하고, 간질거리고, 따뜻하고, 촉촉하다. 그리고 이런 사랑이라면 몇 번이든 아파도 될 거 같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한다는 것은 정말 축복받은 감정이다. 처음엔 보고 싶고 그리워하고 미워하던 마음이 나중엔 고마움으로 바뀌고, 애틋한 감정으로 바뀌는 거 같다.     

 

내 열여덟에 네가 스치고 가서 너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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