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훔쳤잖아!’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날 살면서 가장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껴보았다. 그동안 아무 탈 없이 학교생활을 하던 나였는데, 처음으로 학교를 나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 ‘이미 소문은 다 퍼져있겠지?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봤자 아이들은 믿어주지 않을 거야.’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내 성격이 조금 바뀌게 된 것이 온전히 이 일 때문만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분명히 영향을 미쳤던 사건이 한가지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난 수줍음도 별로 없고, 소심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아이였다. 주목 받는 걸 꺼려하지 않아서 모둠에서 리더 역할을 자처하거나 학급 반장 선거에도 나갈 정도로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고 여러 친구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다.
그 당시 나는 주로 두 명의 친구와 가장 오랜 시간을 붙어다녔다. 등하교도 함께하고 점심도 같이 먹었다. 한 명은 체구가 아담하고 얼굴이 마치 인형같았다. 피부가 하얗고 눈빛이 아주 선명한 아이이다. 다른 한명은 키가 크고 단발머리를 한 아이였다. 하루는 그 인형같다는 아이가 감기에 걸렸는지 아침부터 병원에 다녀오느라 거의 점심시간이 되기 직전에 학교에 도착했다. 우리 초등학교는 항상 아침에 오면 교탁에 놓인 노란 바구니에 휴대폰을 내고 그날 당번이 교무실에 가져다둔다. 그 아이는 늦게 도착했으니 휴대폰을 낼 바구니가 교실에 없었다. 항상 휴대폰을 걷던 아침 시간이 아니라서 그런가, 그다지 휴대폰을 내야겠다는 생각도 안 하고 있는 듯 보였다. 휴대폰을 무심히 가방속에 던져둔 채 우린 점심을 먹으러 갔다.
우리 세명은 항상 밥을 먼저 다 먹은 사람이 급식실 계단 밑에서 다른 친구들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주었다가 교실로 돌아가는게 루틴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단발머리 아이에게 조금 신경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오늘은나 먼저 올라가 있을게” 유독 밥을 깨작깨작 먹는둥 마는둥 하더니 절반도 먹지 않았는데 그만 먹겠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벌써 가? 속이 안 좋아?” 우리의 물음에 조금 뜸을 들이더니, 오늘은 그냥 먼저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 그냥 별 이유 없을 수 있지..’ 하고 생각했던 우리는 그럼 오늘은 먼저 가라고 했고, 남은 밥을 천천히 먹으며 둘이서만 교실로 돌아왔다.
4교시, 5교시. 수업은 평화롭게 흘러가고 곧 종례시간이 되었다. 선생님께서 여러 가지 안내장을 나누어 주시며 마무리 말씀을 하시던 와중, 나랑 둘이 교실로 돌아왔던 인형같은 그 아이가 계속 무언가를 찾으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더니 교탁에 서계신 선생님께 다가가 귓속말로 무언가 말을 전달했는데, 그 목소리는 나에게까지 들리지 않았지만 곧이어 선생님이 하시는 말에 그 내용을 알 수 있었다. “다들 가방이나 본인 서랍, 근처에 다른 친구의 휴대폰이 있는지 살펴보세요” 그 아이의 휴대폰이 없어진 모양이었다. 그날 점심시간 전 학교에 도착하고 하루종일 휴대폰엔 관심을 두지 않아 언제부터 없어졌는지도 알 수 없을 터였다. 가방에 툭 던져두고는 꺼내지도 않았으니 없어졌을리도 없었다. 괜한 걱정이 많은 나는 훔치지도 않았는데 들어있을까봐 내심 조마조마하며 가방 가장 큰칸을 열어 살펴보았지만 다행히 없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대폰이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자 선생님은 일단 우리들을 모두 돌려보냈고, 끝까지 그 아이의 휴댚폰을 찾아주기 위해 우리 셋, 다른 여자아이 한명과 선생님. 이렇게 다섯이서 교실에 남았다. 그날은 내가 한주중 가장 좋아하는 피아노 방과후까지 빼먹었다. 남은 우리 네명과 선생님은 혹시 몰라 복도에 있는 각반 신발장, 사물함, 청소도구함까지 구석구석 휴대폰을 찾았다. 그 아이의 휴대폰은 꺼져있던 건지 무음이었던 건지, 전화를 걸어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단발의 아이가 조심히 말했다. “혹시 모르니까 우리 가방이라도 다시 꼼꼼히 찾아보자”, ‘가방은 아까 뒤졌잖아?’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정말 혹시 모르니 제안대로 각자의 가방을 다시 살폈다. 아깐 가장 큰칸만 열어보았으니 이번엔 가장 작은칸까지 내 가방의 지퍼를 모조리 열어보았다. 그런데 내 가방 가장 작은칸을 뒤지려고 손을 집어넣자 무언가가 만져졌다.
한 손에 딱 잡히는 무언가, 휴대폰이었다. ‘이상하다, 내 휴대폰은 주머니에 넣은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며 가방에서 꺼냈는데, 그건 놀랍게도 그 아이의 휴대폰이었다. 나는 상황파악도 안 되어서, 순간 그저 찾았다는 것에 안도하려 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당황스러움에 입도 떨어지지 않게 되었다. 계속 아니라고 말해봤자 그 아이들 귀엔 변명만 늘어놓는 걸로 들릴까봐서, 내가 한 짓이 아니라는 말도 그리 당당하게 하지 못한채 그저 ‘이게 왜 여기 있지’라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 직후 교실에선 딱히 무슨 말이 오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고, 선생님께선 우리를 서둘러 돌려보냈다.
우리는 함께 계단을 내려왔다. 나는 괜히 당당해 보이고 싶어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며 말을 걸었다. “네 폰이 왜 나한테 있었을까?” 그럼에도 돌아온 답은 ‘니가 그랬잖아!’라며 힘껏 소리치며 나를 쏘아보는 얼굴 뿐이었다.
나는 소심하진 않았지만 남들의 시선을 신경쓰는 아이였기에 더더욱 다음날 학교를 가야한다는 사실이 덜컥 두려웠다. 아이들이 나를 도둑 취급하며 어울려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우리는 고작 초등학생이었다. 사실은 모른채 본인들이 들은 것만을 가지고도 나를 외면 하는 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아니나 다를까, 얘기가 언제 퍼진 것인지 대놓고 도둑이라는 말은 누구도 하지 않았지만 모두들 어렴풋이 알고 있는 눈치였다.
“어제 없어졌던 휴대폰 말인데요” 선생님께서 입을 열자마자 어떤 여자아이가 외쳤다. “그거 휘원이가 그런거라던데요” 선생님은 당황하며 그 애를 조용히 시켰다. 물론 누구보다 당황한 건 나였다. 예상은 했지만. 내 성격도 특이했던 것 같다. 주목 받는 걸 싫어하지 않고 소심한 아이도 아니었으면서, 반 아이들에게 다 들리는 목소리로 ‘내가 한 거 아니야’라고 소리칠 용기는 없었다.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용기를 내어 조심히 뒷자리 친한 나자아이에게 내가 한 거 아니라고 조용히 호소했다. 그랬더니 그 남자 아이는 평소에 짓궂게 장난 치던 모습과는 달리 다소 진지한 얼굴로 ‘넌 절대 아닐 거야’라고 말해주었다. 고작 그 한마디라도 내가 그동안 누군가에게 신뢰감을 쌓아주고 있었던 것 같아서 무척 기뻤다. ‘모든 아이가 날 의심 하는 건 아니구나’ 하면서 큰 위로가 됐던 것 같다.
아마 그 시점 이후로 나는 모든 행동에 조심성을 더하는 아이가 된 것 같다. 그렇게 흐지부지하게 일은 파묻혔고 우린 5학년이 되었다. 다행히도 우리 셋은 크게 서먹서먹해지진 않은채 각자 반이 갈라졌다. 5학년이 되고 학기초, 나는 단발머리 아이와 놀이터에서 놀기 위해 단둘이 만났다. 군것질거리를 먹으며 멀뚱멀뚱 그네에 앉아있는데. 그 아이가 내게 말했다.
“나 사실 너한테 할말이 있어” 내가 할말이 뭐냐고 묻자, ‘아 아무것도 아니야’라며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 내용이 대충 짐작이 갔지만 굳이 더 캐묻진 않았다. 사실 엄마와 나는 마음속으로 누가 그런 짓을 꾸민 것인지 속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단발머리 아이가 꾸민 짓일거다. 그런데 증거는 없었다. 고작 그날 단발 아이가 유독 밥을 빨리 먹고 혼자 교실로 올라가 버린 것, 그때 당시 가장 자주 붙어 다니던 아이라는 것. 그것만 가지고 그 애가 한 짓이라고 지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진범이 누구인지는 확신하지도 못한채 1년이 흘러가버렸다.
“미안해”
난 5학년 2학기, 드디어 그 단발 머리 아이에게서 자신이 그랬다는 말과 함께 사과를 받아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사과를 받아낸 경위가 썩 내키지 않는다. 과정은 이렇다. 5학년 끝날 무렵 한 친구와 단둘이 만나 놀기로 한 날이었다. 이 친구는 문제의 일이 있던 날 우리 셋, 선생님과 함께 방과후까지 남아서 휴대폰을 찾았던 다른 친구 한명, 그 아이이다. 어쩌다 휴대폰 사건 이야기가 나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나는 거기서 조금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 아이는 믿어주려나?’ 하는 마음으로 내가 말했다. “그때 그 일 내가 한 거 아니야”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황당했다. “응? 이미 알아. 그거 단발머리 걔가 한거잖아?”
나조차 진범이 누군지 단언할 수 없는데 이 애는 어떻게 알고 있는걸까. “그걸 어떻게 알아?” 그 아이가 설명했다. “몰랐어? 걔가 직접 말했어, 자기가 그랬다고. 그리고 휴대폰 주인한테 사과도 했대” 이 말을 듣자마자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어째서 휴대폰 주인에게만 사과를 하고 나에겐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지? 사과는커녕 털어놓은 적도 없다. 심지어 제 3자나 다름없는 이 아이도 알고 있는데. 휴대폰 주인인 그 아이도 왜 나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은 걸까. 내가 이미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나? 아니면 그 단발머리 애가 나에겐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나? 그날은 정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아마 엄마가 4학년 담임선생님께 따로 연락을 드렸던걸로 기억한다. 선생님은 나를 교실로 부르셨다. 이미 다른 애들은 따로 불러서 이야기를 끝내셨던 듯 하다. 선생님께서 말하셨다. “그 애가 너한테 사과하고싶대” 그렇게 1년이 지나고서야 받은 사과가 썩 기쁘진 않았다. 만약 그날 그 친구가 나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계속 정확한 진범을 몰랐을 것이고, 그렇다면 앞으로도 그 단발머리 애가 나에게 사과할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영원히 비밀로 할 생각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내가 너무 깊게 생각한걸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사과가 사과처럼 와닿지 않았다. 애초에 사과의 말도 무미건조한 ‘미안해’ 이 세글자 뿐이었다.
선생님께서는 그 애가 말하길, 그런 짓을 한 이유를 ‘실수였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실수로 남의 휴대폰을 다른 사람 가방에 몰래 집어넣기도 하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결국 묻어둘 뿐이었다. 그렇게 남은 초등학교 시절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보냈다. 나에게 그런 짓을 한 진짜 이유는 아직도 모른다. 나중에 들은 얘긴데, 선생님께선 절대 내가 했을리 없고, 나에게 질투한 다른 아이가 일으킨 짓이라고 예상하셨다고 한다. 휴대폰 주인인 그 아이의 어머니께서도 내가 그럴 애는 아닐 거라고 우리 엄마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은 생각보다도 많이 있었다. 1년이 지나서야 사과를 받았으니 만약 반 아이들이 이 일을 기억하고 있다면 대다수의 아이들은 아직까지도 내가 범인이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을 겪고 진범이 누군지 알아도 화를 내는 것 보다 용서하는게 훨씬 쉬웠고, 자신이 상처 받더라도 그저 평화로운게 좋았다. 어쩌면 그런 성격 때문에 일어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제는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내가 한 짓이 아니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타인에게 신뢰받고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인지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누구도 나를 믿어주지 못할거라며 덜컥 겁을 먹었으나 이젠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 아이는 나에게 그런 짓을 했으니 좋은 친구라고는 차마 말 못하겠지만, 여러 의미로 인생에서 잊지 못할 친구가 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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